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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료
디지털 복합지정학과 ‘플랫폼의 플랫폼’ 경쟁
  • 김상배
날짜2022.09.30
조회수6492
  • 김상배 교수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sangkim@snu.ac.kr
  • 최근 미중 두 강대국의 기술경쟁이 다양한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4차 산업혁명 분야의 첨단기술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미중이 벌이는 첨단부문의 기술경쟁은 민간 부문에서 기업들이 벌이는 경쟁의 차원을 넘어선다. 양국의 정부, 경우에 따라서는 양국의 국민까지도 참여하는 다차원적인 국력경쟁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좁은 의미의 기술과 산업을 넘어서 무역과 금융, 정책과 제도, 외교와 규범 등을 포괄하는 복합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최근 미중 양국의 기술경쟁이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본 디지털 패권경쟁을 방불케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 미중 기술경쟁의 안보화
    • 미중 기술경쟁의 외연이 넓어지고 내용이 다양해지는 가운데,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기술변수와 안보문제의 만남이다. 첨단기술 분야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양국의 경쟁이 국가안보라는 구도에서 이해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신흥기술(emerging technology)의 변수가 미래 국력경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것만큼 기술경쟁력이라는 변수가 안보문제라는 프레임에 투영되어 해석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의 미중경쟁을 보면 기술변수가 경제와 산업의 경계를 넘어서 안보와 외교의 문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기술안보는 국가 및 국제안보를 좌지우지하고 ‘지정학적 위기’를 야기하는 요인으로 부각되는 양상을 보인다.
    • 최근 기술변수가 안보문제와 만나 새로운 국가안보의 이슈를 제기한 대표적인 사례는 사이버 안보였다. 2010년대 들어 해킹 공격과 이에 대한 방어의 문제는 단순한 기술과 공학의 문제를 넘어서 급속히 군사와 외교, 그리고 국가안보의 쟁점이 되었다. 완벽한 방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격자를 밝히기조차 쉽지 않은 특성상 사이버 안보는 일찌감치 국가안보 이슈로 ‘안보화(securitization)’되었다.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2010년대 후반을 장식한 것은 중국 기업 화웨이가 제공하는 5G 인프라의 신뢰성 문제였다. 화웨이 5G 장비에 심어진 백도어를 통해서 국가안보를 위협할 데이터와 정보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반도체와 같은 첨단기술의 공급망 안보와 디지털 경제의 활성화를 배경으로 한 데이터 안보도 문제시되었다. 우주경쟁과 인공지능(AI)을 장착한 자율무기체계 경쟁도 기술안보의 이슈로 가세했다. 더 나아가 기술발달은 군사혁신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미래 전쟁의 승패를 가를 변수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 신흥기술의 변수가 야기하는 안보문제는 해킹 공격이나 인프라 및 공급망 보안, 우주의 군사화, 드론 작전, 킬러 로봇의 도입 등과 같은 좁은 의미의 군사안보에 머물지 않고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글은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기술안보의 문제를 신흥안보(emerging security)의 시각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첨단기술과 관련된 신흥안보의 세계정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 최근의 미중경쟁 과정에서 늘어나고 있다. 신흥기술의 신흥안보 쟁점들이 양적으로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 다양한 이슈와도 연계되고 있다. 최근 미중경쟁의 불꽃이 무역을 넘어 관세, 환율, 자원, 그리고 군사안보와 동맹외교, 국제규범 등이 관련된 분야로 번져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중경쟁은 일부 분야에 국한된 이해갈등이 아니라, 양국의 사활을 건 외교안보의 의제로 진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 디지털 패권의 복합지정학
    • 2019년 1월 세계경제포럼(WEF)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발달 문제를 ‘지정학적 위기’의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오늘날 기술발달이 불균등 성장과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더 나아가 정치적 갈등과 지정학적 위기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문제 제기였다. 실제로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벌어지는 강대국들의 경쟁은 이러한 불평등과 갈등 및 위기를 더욱 조장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중 신흥기술 경쟁의 양상은 지정학적 위기를 낳을 조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이러한 양상은 ‘디지털 기술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이라는 의미로 ‘디지털 지정학(Digital Geopolitics)’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디지털 지정학의 초기 쟁점이 사이버 안보였다면, 이러한 안보위협이 양적으로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 다양한 안보 문제와도 연계되고 있다. 최근 미중 기술경쟁의 불꽃이 기술·산업 분야를 넘어서 무역·경제 분야로 연계되고, 더 나아가 군사안보와 동맹외교, 국제규범 등이 관련된 분야로 번져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중 기술경쟁은 양국의 사활을 건 글로벌 패권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 디지털 기술안보가 지정학적 문제가 되었다지만, 이것이 단순히 전통적인 고전지정학의 시각으로 회귀하여 문제를 보자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기술안보는 기본적으로 사이버 공간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탈(脫)지리적 공간의 안보 문제라는 속성을 지닌다. 게다가 글로벌 시장을 배경으로 하여 영토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국적 자본의 비(非)지정학적 활동이 저변에 깔려 있다. 디지털 기술안보의 진화 과정에서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위협의 존재만큼이나 그 위협을 주관적으로 구성해 내는 담론정치의 과정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 기술-안보-권력의 복합지정학
    • 따라서 디지털 패권경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 지정학의 협소한 시각에만 머물지 말고, 최근의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서 개발된 다양한 이론적 논의를 엮어내는 새로운 지정학의 시각, 이른바 ‘복합지정학’의 시각을 원용해야 한다. ‘디지털 패권의 복합지정학’으로 본 미중경쟁은 좁은 의미에서 본 기술경쟁의 차원을 넘어서 디지털 안보 분야의 기술과 표준 및 규범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 다양한 군사적 함의를 갖는 방위산업 이슈와 우주 및 미래전 이슈들이 연계되면서 기술-안보-권력의 복합지정학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그림] 참조).
    • 동맹·외교와 규범·가치의 플랫폼 경쟁
      • 최근 미중 디지털 패권경쟁에서 주목할 부분은 ‘동맹과 외교의 플랫폼 경쟁’이 부상하는 현상이다. 2020년 8월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중국으로부터 중요한 데이터와 네트워크를 수호하기 위한 클린 네트워크(Clean Network) 구상을 발표했다. 클린 네트워크 프로그램은 이동 통신사와 모바일 앱, 클라우드 서버를 넘어서 해저케이블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모든 IT 제품을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민의 개인정보 보호 등을 위해 사실상 전 세계 인터넷 비즈니스와 글로벌 통신업계에서 중국 기업들을 몰아내겠다는 뜻이다.
      • 이에 대해 중국은 ‘글로벌 데이터 안보 이니셔티브’로 맞대응했다. 2020년 9월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다자주의, 안전과 발전, 공정과 정의를 3대 원칙으로 강조했다. 데이터 안보에 대한 위협에 맞서 각국이 참여하고 이익을 존중하는 글로벌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구상은 데이터 안보와 관련해서 다자주의를 견지하면서 각국의 이익을 존중하는 글로벌 데이터 보안 규칙이 각국의 참여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일부 국가가 일방주의와 안전을 핑계로 선두기업을 공격하는 것은 노골적인 횡포로 반대해야 한다며 미국을 겨냥했다.
      •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클린(clean)’이라는 말에 담긴 것처럼 ‘배제의 논리’로 중국을 고립시키는 프레임을 짜려 하고, 중국은 새로운 국제규범을 통해 동조 세력을 규합해 미국 일방주의의 덫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좀 더 넓게 보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중 양국이 벌이는 동맹과 외교의 플랫폼 경쟁에서 어느 측이 이길 것이냐의 여부는, 미중 양국이 제시한 어젠다에 얼마나 많은 국가가 동조하느냐에 달려 있다.
      •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일대일로 구상을 앞세운 중국의 행보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이른바 ‘디지털 실크로드’를 따라서 미래 디지털 세계에 중국의 구미에 맞는 국제규범을 전파하려 한다. 다시 말해, 중국은 디지털 실크로드를 통해서는 전 세계에 ‘디지털 권위주의 모델’을 수출하여 정치적으로 비(非)자유주의에 입각한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이렇게 보면, 미중이 벌이는 플랫폼 경쟁은 외교 분야의 ‘내 편 모으기’ 경쟁일 뿐만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규범과 가치의 플랫폼’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다. 20세기 후반 구축된 미국 주도의 규범과 가치의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와 이를 반영한 디지털 플랫폼이 작동했다. 이제는 중국의 규범과 가치가 도전한다. 실제로 중국은 자신만의 규범과 가치가 적용된 디지털 플랫폼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반대편에 미국을 중심으로 또 다른 거대 플랫폼 블록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클린 네트워크 구상도 그러한 경향을 담았지만,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그러한 가치 지향이 더 커지고 있다. 기술보다 가치를 강조하고 안보보다 규범을 강조하는 경향이 역력하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동맹 전선을 고도화하여 국제적 역할과 리더의 지위를 회복하고 다자주의를 강조한다.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국가 기반시설 수호를 위해 다른 국가와 협력을 표명하며, ‘하이테크 권위주의’에 대한 대응의 차원에서 ‘사이버 민주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공세에 대응하여 중국도 보편성과 신뢰성, 인권규범의 문턱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보편 규범과 가치의 플랫폼 경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 ‘플랫폼의 플랫폼’ 경쟁
      • 미중이 벌이는 동맹·외교 및 규범·가치의 플랫폼 경쟁은 ‘플랫폼의 플랫폼’(Platform of Platforms) 경쟁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어느 한 부문의 플랫폼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라기보다는 여러 플랫폼을 아우른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종합 플랫폼’ 또는 ‘메타 플랫폼’의 경쟁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사실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글로벌 패권경쟁’이라는 개념도 바로 이러한 ‘플랫폼의 플랫폼’ 경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권력질서를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플랫폼의 플랫폼’ 경쟁의 결과는 어느 일방의 승리로 귀결될 수 있다.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세력전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플랫폼의 플랫폼’ 경쟁은 두 개의 플랫폼이 호환되지 않는 상태로 분할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 최근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플랫폼의 플랫폼’ 경쟁은 전자보다는 후자의 전망을 더 강하게 갖게 한다. 다시 말해, 최근의 추세는, 미국과 중국이 디지털 패권경쟁을 벌이면서 전 세계를 연결하던 인터넷도 둘로 쪼개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중국의 성장과 미중 무역전쟁, 공급망 디커플링, 탈지구화, 민족주의, 코로나19 등으로 대변되는 세계의 변화 속에서 ‘둘로 쪼개진 인터넷’은 쉽게 예견되는 사안이다. 미국을 추종하는 국가들은 미국 주도의 반쪽 인터넷을 이용하고, 중국에 가까운 국가들은 중국 주도의 나머지 반쪽 인터넷을 이용할 것이라고보는 시각에 일단 힘이 실린다. 한국처럼 미중 양국에 대한 안보 또는 경제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둘로 쪼개진인터넷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 사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인터넷 세상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중국 내에서는 유튜브, 구글 검색,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넷플릭스 같은 서비스는 물론 해외의 유명 언론매체도 차단되고 있다. 중국은 만리방화벽에 빗댈 정도로 강력한 인터넷 통제 시스템을 통해 자국 체제를 반대하는 정보가 유입되지 못하도록 막고, 국내의 중국민들이 외국의 인터넷 플랫폼에도 접속할 수 없도록 차단했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구글과 페이스북, 트위터 대신 바이두나 위챗, 웨이보 등을 사용하게 됐다. 중국은 이러한 만리방화벽 안에서 자국 기술회사들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콘텐츠를 검열받도록 통제하고 있다.
      •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쪼개진다(Splinter)’와 ‘인터넷(Internet)’의 합성어인 ‘반쪽 인터넷(Splinternet)’이라는 용어로 담겼다. 2018년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은 이러한 반쪽 인터넷의 등장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는데, 그는인터넷 세계가 미국 주도의 인터넷과 중국 주도의 인터넷으로 쪼개질지도 모른다고 예견했다. 이러한 분할의비전은 반도체 공급망의 분할과 재편, 데이터 국지화, 전자상거래와 핀테크 시스템의 분할, 콘텐츠 검열과 감시 제도의 차이 등으로 입증되는 듯하다. 여태까지의 인터넷이 국경이나 종교, 이념 등과 관계없이 ‘모두’를 위한자유롭고 개방된 형태의 WWW(World Wide Web)이었다면, 앞으로 출현할 분할인터넷은 지리적으로 영역을 구분하여 지역별로 구축된 RWW(Region Wide Web)가 될 가능성이 있다.
      • 이러한 복잡한 변화가 중견국 한국의 미래전략에 새로운 기회와 도전을 제기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지난 2018년 발생하여 2019~2020년에 정점에 이르렀던, 이른바 화웨이 사태는 한국에게도 5G 통신장비 도입 문제가 단순한 기술·경제적 사안이 아니라 외교·안보적 선택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미래 국력을 좌우할 첨단기술 분야의 미중 갈등은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사이버 동맹외교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과 디지털 실크로드전략도 이에 맞서는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한국의 외교전략적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웨이사태와 같은 도전이 다시 한번 제기된다면 한국은 어떠한 전략을 모색해야 할지에 대한 좀 더 면밀한 탐구가 필요하다.
  • 김상배 교수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sangkim@snu.ac.kr
    • 김상배 교수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sangkim@snu.ac.kr